백남준. 서울에서

백남준. 서울에서
2017. 4. 2. 11:54 최근 진행중인 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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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남준. 서울에서

백남준 10주년을 기념하여 갤러리 현대에서 열렸던 전시.

지금 백남준작가의 작품을 만나는 것은 더 쉽다. 서울 종로 뒷길.
골목과 골목이 잇닿은 모퉁이 자그마한 한옥집.
백남준 생가터인 이곳이 번듯한 기념관으로 바뀌었다고한다.



백남준

1932년 서울에서 태어나 서울과 홍콩에서 중학교를, 일본 가마쿠라에서 고등학교를 다녔고 도쿄대학교에 진학해 미학을 전공한 후, 아놀드 쇤베르크의 음악으로 졸업 논문을 썼다. 1956년 독일로 건너가 유럽 철학과 현대 음악을 공부하는 동안 동시대 전위 예술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기존의 예술 규범, 관습과는 다른 급진적 퍼포먼스로 예술 활동을 펼쳤다. 이 때부터 새로운 미디어를 이용한 예술의 방식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1963년 텔레비전의 내부 회로를 변조하여 예술 작품으로 표현한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을 통해 미디어 아티스트의 길에 들어섰다.

백남준은 1964년 미국으로 이주하면서 본격적으로 비디오를 사용한 작품 활동을 전개해 나갔다. 비디오 영상뿐만 아니라 조각, 설치 작품과 비디오 영상을 결합하고, 자유자재로 편집할 수 있는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하였으며, 여기에 음악과 신체에 관한 끊임없는 탐구까지 더해져 백남준만의 독보적인 예술 세계를 구축하였다. 1980년대부터는 <굿모닝 미스터 오웰>을 필두로 위성 기술을 이용한 텔레비전 생방송을 통해 전위 예술과 대중문화의 벽을 허무는 글로벌 프로젝트를 기획하였으며, 1993년 베니스비엔날레에 독일관 대표로 참가하여 유목민인 예술가라는 주제의 작업으로 황금사자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레이저 기술에까지 영역을 확장해 나가던 가운데 1990년대 중반 뇌졸증이 발병했다. 하지만 2006년 마이애미에서 타개할 때까지 백남준은 예술적 실천을 멈추지 않았다.

백남준은 미디어 아트의 개척자로서 다양한 테크놀로지를 이용하여 실험적이고 창의적으로 작업했던 예술가이다. 예술가의 역할이 미래에 대한 사유에 있다고 보았으며 예술을 통해 전지구적 소통과 만남을 추구했던 백남준은 “과학자이며 철학자인 동시에 엔지니어인 새로운 예술가 종족의 선구자”, “아주 특별한 진정한 천재이자 선견지명 있는 미래학자”로 평가 받으며 여전히 가장 “현대적인 예술가”로서 우리 곁에 숨 쉬고 있다.





난 몽골을 좋아해, 몽골 사람들하고 우리들하고 3천 년 전에 헤어졌는데 그 3천 년 전 우리 것을 몽고 사람들이 보존하고 있어요. 난 공자, 노자, 이런 사람들 이전을 좋아해요. 신석기시대 같은 것에 관심이 많아요. 그리고 후대로 내려올수록 역사가 엉터리입니다. 대부분 읽고 생각해볼 가치가 없는 쓰레기뿐입니다.백남준 (김용옥, <석도화론> 중에서), 2001

나는 TV로 작업을 하면 할수록 신석기시대가 떠오른다. DNA는 인종차별주의가 아니다,1988

나의 실험적 텔레비전은 “완전 범죄”를 가능케 한 최초의 예술작품이다.<실험TV 전시회의 후주곡>, 1964

콜라주가 유화를 대체하듯 브라운관이 캔버스를 대체하게 될 것이다.“백/아베 영상 합성기”, <비디아 앤 비디올로지 (1959-1973)>, 1974





원래 예술이란 사기다. 속이고 속는 거다. 독재자가 대중을 속이니까 예술가는 독재자를 속이는 사기꾼, 그러니까 사기꾼의 사기꾼이다. 고등 사기꾼 말이다.1984

만약 현대예술이 고등 사기라면, 비디오는 5차원의 사기인 것이다.1986

얼마만큼이 생이며 얼마만큼이 연출이며 얼마만큼이 사기가 되느냐.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진리는 가면의 진리다.
월간 <춤>, 1986년 11월

뉴턴의 물리학은 강함이 약함을 누르는 비융합적 이중구조와 권력구조를 갖는다. 하지만 1920년대 독일의 한 천재는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진공관 안에서 양극과 음극 사이에 전극을 첨가시켰다. 그러므로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약함이 강함을 이기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불교적 ‘제3의 길’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사이버네틱스 예술>, 1965





행복이냐? 아마…
배반이냐? 아마…
출세주의냐? 아마…
겁쟁이냐? 아마…
우리들의 8・15로 돌아가자. 해방 20년이 다가온다.
슈투트가르트 좀 아카이브, 196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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